에피소드 5: 한 걸음 더
기정이 문자 보낸 지 벌써 삼 주일쯤 지나가 버렸다. 처음에 우연이는 답변을 보내려고 했었는데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다음날까지 미루게 되고 결국에는 답변을 아직 보내지 않은 것도 잊었다. 문자를 보낼 생각이 가끔 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할 일이 많아지고 문자를 보내는 것이 무서워졌다. 우연이는 맨날 대본을 쓰니 학점이 자꾸 점점 더 떨어지고 있었다. 매주 새롭게 쓴 대본을 감독에게 냈는대 대본 쓰기에 집중한 우연이는 과제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었고 어느 날 점수가 나온 것을 보고 보고 깜짝 놀라서 울 뻔했다. 이후로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을 잘 본 우연이는 다시 과제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기정이를 못 봤다. 회사도 안 가고 대본을 혼자 쓰는 우연이는 자꾸 떠오르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생각하면 안 돼.
그날이 되어 우연이는 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회사 앞까지 와 있었다. 이유 없이 토할 듯 배가 아프고 있었다. 왤까? 생각하고 한숨을 쉬은 우연이는 마음을 먹었다. 무섭지 않아. 하나도 무섭지 않아. 기정이를 다시 보겠지, 뭐… 우연이는 회사 정문에 들어가서 회의실로 갔다. 대본 리딩은 바로 그 날이었다.
남기정, 전 남자친구. 안예림, 전 남자친구를 좋아하던 그 나쁜 짓을 많이 한 여자.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식: 남자 악역으로 들어온 변태신. 태신이는 고등학생 때 집에서 멀리 떨어진 아파트에서 자취하면서 기정이와 살았던 친구였다. 둘은 재밌게 놀기도 싸우기도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옛날에 우연이는 이상해 보였던 태신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기정이의 친구라 잘 해 주었다.
그날 세명 다 다시 보게 될 생각이 든 우연이가 대본 리딩 있는 사무실 밖에 멈추고
잠시 망설였다. 나는 멋져. 나는 멋져. 나는 멋져.
다행히, 대본 리딩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정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서 대본을 읽었고, 예림이는 감독의 말을 듣고 예쁘게 웃기만 했고, 태신이만 우연이를 쳐다봤다.
“오랜만이네.” 대본 리딩 후 태신이는 느닷없이 다가와서 일부러 말을 걸었다. 그는 기정이를 힐끔보고 미소를 살짝 지으며 또 말을 걸었다.
“우연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다니. . . 운명이라 할까? 반갑다, 진짜.”
기정이는 아직 우연이 쪽으로 보지 않으면서 태신이를 바라봤다. “입 좀 조심해라.”
“왜? 나랑 싸울래? 옛날처럼 또 싸울까 우리? 근데 그때 우연이랑 바로 헤어진 후 우리 싸웠잖아. 요즘 넌 내 라이벌 아냐. 아, 그래. 처음에 모델로, 이제 배우로서도 내 라이벌 맞겠지. 그런데 우연이 관련한 일은….넌 라이벌 아니잖아. 알잖아. 걔는 너랑 헤어진 거.”
스탭들은 거의 다 방에서 나가고 없었지만 감독은 남아 있었다. 감독은 몰래 보고 있었다. 웬일이었을까? 그 귀엽고 평범한 웬툰 작가가 이런 신기한, 아무도 모르는 과거가 있었다니…
“그리고,” 태신이가 우연이를 바라보고 계속 말했다. “우연이는 완전 이뻐졌어.”
“우연이는 처음부터 여신이였어!” 일어서서 화가 난 기정이가 소리 질렸다. “그리고 날 떠나길 잘 했어!”
“어? 그럼 네가 왜 아직 좋아하는 척 하고 있어?”
“….”
“자, 자, 진정하시죠.” 이제 감독이 말을 했다. “오늘은 많이들 고생하셨는데 배고프시죠? 회식은 어때요? 회사 안에서 음식을 준비하려고 하는데 식사 같이 하시겠어요?”
“….”
뒤에서 중얼거리는 예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기적인 기지배야. 항상 익명, 익명, 유명해지면 안 돼…”
감독이 못 들은 척하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좋네요! 회사 식당으로 모셔 드릴게요~” 감독은 우연이의 손을 잡고 같이 방을 나갔다. 우연이가 드디어 숨을 좀 쉴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이거…왜…
회식은 경직된 분위기의 식사였다. 기정이는 묵묵히 앉아 있었고 예림은 매니저하고만 말을 하고 있었다. 감독이 기정과 태신 가운데 앉아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우연이와 대화를 열심히 하려고 했다. 우연이를 꼬시려고 태신이는 자꾸 말을 걸었지만 우연이는 결국 일어서서 인사주고 자리를 나섰다.
“공부할 것이 많아서…”라고 하면서 회식 자리에서 일찍 떠난 우연이는 급히 나왔다.
“우연아. 잠깐만. 가지마. 나 할 말 있어.”
우연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따라오지 마.”
“걱정됐잖아. 아까 안예림이 중얼거리는 걸 못 들었어? 조심해야 해, 우연아. 쟤는 복수할 수도 있어.”
우연이가 갑자기 돌아서서 기정이를 바라봤다.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끼며 물어봤다. “아까 한 말. ‘날 떠나길 잘했다는 건’ 무슨 말이야?”
“갑자기 왜? 우연아, 감독님한테 도와 달라고 해 봤어? 예림이가 진짜 위험할 것 같은데. 익명으로 하고 싶은 거 쟤가 다 일부러 망칠 수도 있어.”
말도 없이 우연이가 기정이를 바라봤다. 기정이는 한숨을 쉬고 다시 말했다.
“넌 그때 뭘 그리 잘했다고…. 나한테 헤어지자고 해서 우리 서로 안 아프게 더 좋은 사람도 되고, 꿈도 더 잘 꾸고, 내가 더 좋은 남자로 변할 수 있게 해 줬다는 말이었어. 아팠어. 지금도 가끔 아프지. 그런데 다시 보게 됐잖아. 네 선택이 옳았어. 그래서 잘 했다구 했지. 내가 모델로 활동도 하고, 배우도 되고-“
“그런데 왜 나를 이렇게 자꾸 따라와? 헤어진 걸 잘했다면서!”
“난—난!” 기정이는 말하려 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연이는…”
“날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왜 이래?”
우연이가 다가가서 화난 목소리로 물어봤다. 기정이는 망설였다가 갑자기 한 걸음 더 다가와서 우연이의 얼굴을 손으로 쌀쌀하게 잡았다. 옛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는 울면서…
하지만 이것이 현재였다. 잠시 동안 서로 눈을 맞추다가 기정이는 몇 년 만에 전 여자친구의 입술에 키스해 버렸다.
삼 초 후 감독이 갑자기 나오는 바람에 둘은 깜짝 놀라서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감독만 남아 있었다.
“오늘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감독이 아무도 없이 방 혼자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둘이 옛날 상처 잘 해결했음 좋겠네….서로 얼마나 그리웠을까….?”
감독은 생각을 깊이 하면서 피씩 웃었다.
“젊은 사랑은 역시 늘 그래. 나도 그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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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우와아아아 키쓰씬 써 버렸네요 ㅎㅎ 참 부끄러워요…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멘트 부탁드려요^^
에피소드 5의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