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55분에 편지에 쓰인 장소로 도착했다. 아무리 두리번거렸지만 은호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한번도 가본적 없는 공원에 있었는데 뭔가 수상하면서 익숙한 곳인 것 같았다. 늦가을의 단풍이 공원을 선명한 붉은 색과 노란색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풍경을 보면서 아주 깊은 외로움에 빠졌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지은의 몸이 떨렸다. 계속 걸어다니며 공원에 좀 더 깊이 들어갔다. 빨간색 벤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벤치 위에 또 다른 편지가 있었다. 편지를 개봉해서 읽었다.
“찾았네. 묘지로 가. 정말 신기한 것을 보여줄게 .”
“…응??? 묘지? 색다르고 뻔하지 않으려고 특이한 데이트 코스를 만들고 싶은 마음 있는건 알겠지만 이건 너무 이상하지 않아?”
묘지로 빠르게 걸어서 갔다. 묘비들 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 보여주고 싶은건데??”
묘비를 다 훑어봤지만 단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묘비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김선호. 널 사랑했지만 보내버릴 수 밖에 없었어”
글자가 세겨진 묘비를 쳐다보면서 그녀의 차가운 얼굴에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고 있었다.
“뭐야? … 나 지금 울고 있는 거야? 김선호가 도대체 누군데? 여긴 어디야? 은호가 왜 나한테 이런 거를 보여주는 건데?”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계단실, 헤어드라이어, 화분, 와인을 마시고 있는 은호의 모습… 그리고 다리 위에서 남자랑 여자가 포옹하는 모습…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머리가 아팠지만 마음이 더 많이 아팠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려고 애써도 기억이 안났다.
처음 받은 편지를 가방 안에서 꺼내서 다시 읽었다.
“은호가 싸인을 안 했네…. 누군가가 뭔가를 보여주려고 데리고 온 것 같아.”
“추지은…”
갑자기 그녀에게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고개를 돌리고 짜릿한 소름이 돋았다.
“뭐- 뭐야… 누구야?”
하지만 지은이가 본곳엔 나무들과 묘비 밖에 없었다. 바람에 나무들이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었고 지은이가 너무 무서워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추지은…”
또. 남자의 목소리인지 여자의 목소리인지 몰랐다. 사실은 인간의 목소리조차 아닌 것 같았다. 속삭였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넌 아무것도 몰라! 참 불쌍하네. 넌 네 약혼자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 매일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잖아? 빨리 꿈 깨라.”
귀를 울리는 큰 목소리에 놀라서 돌아보지도 않고 최대한 빨리 도망갔다.